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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함' 이기는 정치인 언제 가능할까

황순규 2011. 6. 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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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고글입니다. 10편쯤 '연재'할 계획인데, 과연 10편을 제대로 채워낼수있을런지..^^; 


인사했는데 음식만 쩝쩝... 내빈의 굴욕
[새내기 구의원의 지방정치 도전기①] '소심함' 이기는 정치인 언제 가능할까
11.06.25 16:33 ㅣ최종 업데이트 11.06.25 16:33  황순규 (essay99)
  
▲ 경로잔치 준비 사과박스에 합판을 얹어 '식탁'을 만들고 있는 모습
ⓒ 황순규
 경로잔치

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천막. 운동장 한 켠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경로위안잔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대부분 동네에서 제일 큰 행사인 경로(위안)잔치는 통상 5월, 6월이면 성황입니다.

 
다른 동네는 모르겠어도, 제가 살고 있는 대구 효목1동의 경우에는 '청년회'에서 주도적으로 잔치를 준비한답니다. 작년부터 청년회 회원이었으니 올해는 함께 준비를 도와봤습니다.
 
하루 일찍 모여서 음식 하고, 천막 치고 할 일이 엄청 많더군요. 날씨도 말썽이어서 전날 설치해둔 천막들은 그날 밤에 모두 엉망이 되었습니다. "새벽 5시에 집결해 주세요"라는 문자를 받아들곤 행사 당일 새벽부터 하루 전에 했던 행사준비를 '1에서 10까지' 다시 반복하고서야 번듯하게 행사준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전 나절까지 함께 땀 흘리다 행사가 진행되기 직전에 집에 가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많고 많은 행사 중의 하나일 뿐일 수도 있었겠지만, 직접 준비를 해보니 쉽게 생각될 수가 없더군요. 그러면서도 이런 자리에 살짝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는 '내빈'들의 존재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뭇 궁금해지더군요. 

  
▲ 내빈석 효목1동 경로잔치 내빈석 모습
ⓒ 황순규
 경로잔치

 

아무도 듣지 않는 '내빈' 인사말...'뻘쭘'하구나

 

청년회에서는 행사를 준비하면서 어르신들을 편하게 모실 고민도 컸었지만, 내빈들 대접도 소홀해선 안 된다는 고민도 많더군요. 내빈석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식사 자리를 따로 어떻게 마련해줄 것인지….

 

행사 참석에 대한 고마움 등으로 어느 정도 예를 갖춰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굳이 '오버'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어서 식사 자리를 따로 마련하는 것은 없던 일로 했습니다. 행사가 행사이니만큼 어르신들과 어우러져서 식사를 하는 게 더 좋은 것 아닐까 싶어서요. 천막 위치, 개수를 두고도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갈 뻔했던 일도 있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선 행사 당일에 내빈으로 앉아 있을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쉽게 정리가 되더군요. 


아무튼 행사는 시작되었고, 으레 내빈소개와 인사말이 진행됩니다. 비단 경로잔치뿐 아니라 이런 류의 행사들에서 제일 큰 비중과 시간이 할애되는 부분이 내빈소개와 인사말입니다.
 
저도 "황순규 동구의원님 오셨습니다"라는 말에 잠시 앞에 나와 이곳저곳으로 인사만 꾸벅 드리긴 했습니다만, 과연 앉아 계신 분들 중에서 얼마나 '내빈'들을 기억해주셨을까요? 
 
구청장, 시의원 등 인사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여 명 가까운 어르신들과 자원봉사자들은 저마다 음식을 드시느라, 나르느라 분주하실 뿐 무대 쪽에 신경을 크게 쓰시진 않는 모습입니다. 그나마 좀 아실 만한 몇몇 어르신들은 공식적인 내빈소개, 인사말이 끝나곤 내빈석으로 오셔서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시곤 하셨습니다만,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앉아서 행사를 즐기시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 장터축제 10.10.01 제5회 효목골장터축제 동구시장. 앞줄 오른쪽 끝이 필자.
ⓒ 황순규
 동구시장

 
구의원 1년 동안 늘어난 건 인사 노하우와 수건들
 
지난해 6월에 구의원이 된 뒤로 1년이란 시간 동안, 행사라는 행사는 거의 빠짐없이 다녀봤습니다. 갑작스런 인사말 순서에 당황하지 않는 '노하우'가 생겼고 수건(기념품)도 많아졌습니다만, 거기에서 만나뵀던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켰을지는 의문입니다.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이면 정리된 구청과 의회의 한 주간 주요 일정과 각종 행사 초대장들이 책상에 놓여 있습니다. 
 
새로운 일정이 아니더라도 매월 같은 날 반복되는 '주민자치위원회', '통우회', '새마을회', '새마을부녀회', '자율방범대' 등의 모임도 있습니다. 다른 모임은 그렇다치더라도 각종 관변단체 및 지역 유지분들이 많은 '주민자치위원회'만큼은 챙겨봅니다.
 
제 지역구가 5개 동이니 주민자치위원회만 월 5번 있는 셈입니다. 모두 다 둘러보면 좋겠지만 제가 사는 동네만 '자문'으로 위촉되어 있기에 그곳만 고정으로 참석하고, 나머지 동은 한 달에 한두 곳씩만 참석합니다. 나름 느슨하게 다녀서 그렇지 욕심을 낸다면 동네마다 6~7개의 단체 모임에 5개 동이면 이것만 하더라도 한 달에 30~40개의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 아양폭포 준공식 아양폭포 준공식. 처음으로 '폭죽 버튼'을 눌러본 날.
ⓒ 황순규
 아양폭포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다이어리에 행사와 모임 일정을 하나씩 적어 넣으며 매번 '꼭 가야 하는 행사인가? 아닌가?'하는 기본적인 고민부터 해봅니다. 그리고 '이번엔 어떻게라도 많은 분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야 할 텐데…'란 생각까지 더해집니다. 누가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스스로가 자기 홍보를 할 수밖에 없는데, 솔직히 돌아보면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의정보고서라도 들고 동네를 다닐 때는 오며가며 얘기 나눌 '거리'가 있으니 마음이 편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지나시는 분에게 "안녕하세요, 구의원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기란 참 어렵죠. 
 
행사에 참석했다 하더라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습니다. 경로잔치 같은 행사엔 천여 명 가까운 어르신들이 계시니 아는 분이 없기는 동네 다닐 때와 매한가지죠. 
 
어떤 구청장은 10년 넘게 동네를 다니며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녀서 그 동네에선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이란 말까지 나오기도 하던데요,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이건 '진보'냐 '보수'냐의 구도가 아니라, '소심함'과 '대범함'의 구도입니다. 

이쯤 되면 "그럴 거면 뭐하러 행사에 다니냐?"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참석하는 건 티가 잘 안 납니다만, 참석하지 않는 건 티가 확 난답니다. "누군 왔는데, 누군 안 왔네", "그 사람 요즘 얼굴 보기 힘들어", "그 사람은 뭐한다고 안 보이노?"라는 말들이 나오는 법이라죠. 이런 행사가 아니고서는 뵐 일이 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 효목1동 경로잔치 기념식이 끝난 후 흥겨운 한마당
ⓒ 황순규
 경로잔치

 

한 해가 더 지나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지


'나홀로'였다면 아마 '꿔다놓은 보릿자루'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행사를 다니다보면 '자극'이 되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시 차원에서 크게 열린 어르신 행사에서, 동네별로 모여 계신 어르신들에게 앞에서 인사말만 드리곤 돌아서려는데, 옆 동네 의원님은 앉아 계신 사이사이를 다니시며 어르신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계신 모습을 봤습니다.  
 
얼마 전 참석했던 상가축제에서도 저는 한창 내 마음의 소심함과 다투고만 있었는데, 행사시간 즈음해 도착한 지역구 국회의원은 행사장 주변을 돌면서 상인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 아직 나는 정치인이 되려면 멀었구나!"라는 탄식과 함께 그제라도 발걸음을 떼봅니다. 아마 한 해가 더 흐르고 난 뒤에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건 '익숙해져야 할 일'이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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