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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1 - 인문, 자연

황순규 2015. 9. 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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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1 - 인문ㆍ자연

저자
강순전 지음
출판사
휴머니스트 | 2006-05-22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리의 눈으로 고전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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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지혜가 이끄는 삶

 


1.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상』 - 철학의 성자가 주는 마음의 양식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을 주겠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좋은 친구로 여겼을 뿐이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젊은이를 타락시킬 수 있단 말인가? 덕을 길러주는 게 곧 타락의 길이라고 여길 정도가 않고서는 이런 말을 감히 못할 것이다. 고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관리를 추첨으로 정하여 뽑는 아테네의 제도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말한 점을 주목한다. 실수를 한다 해도 국정에 미치는 폐해가 훨씬 적은 선장이나 목수가 피리 부는 사람 등등도 추첨으로 뽑지 않는다고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라의 법을 경멸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2.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치열한 자기고백

 


만물은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우주에서 물체들 자체도, 시간 속에서 이것들에 대한 기억도 모든 감각적 사물의 본성은 무엇인가? 쾌락으로써 유혹하는 것들, 고통으로써 위협하는 것들, 허무한 명성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은 얼마나 가치 없고 천하에 열등하며, 얼마나 쉽게 소멸하고 죽어버리는 것들인가. 이 모든 사실을 관찰하는 것이 지성적 능력의 일부가 된다. 의견과 목소리를 냄으로써 명성을 부여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또한 관찰해야한다.

 


3. 데카르트, 『방법서설』 - 진리탐구를 위한 새로운 여정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말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지 말 것.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치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올라가 가장 복잡한 것의 인식에까지 이를 것. 그리고 본래 전후 순서가 없는 것에서도 순서를 상정하여 나아갈 것. 넷째,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열거와 전반적인 검사를 어디서나 행할 것.

 

 

 

Ⅱ. 이성과 자유의 이중주

 

 

 

1. 스피노자, 『에티카』 - 행복은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현자는 현재로서 고찰되는 한에서 거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과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인식하며,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소유한다. 이제 여기에 이르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이처럼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물론 험준한 일임이 분명하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2. 칸트, 『형이상학 서론』 - 새로운 ‘형이상학’을 규명하다

 


형이상학이 만일 학문이라면 그것이 다른 학문들처럼 일반적이고 영속적인 동의를 얻어 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형이상학이 만일 학문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그것이 학문을 가장하고 줄곧 뽐내며 인간 지성을 속여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면서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이나 무지 가운데 어느 편을 증명하든 간에 학문이라고 지칭하는 형이상학의 본성에 대해서 확실하게 규명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더 이상 이대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들은 모두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는데,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처하며 모든 사람이 그 신탁을 바라고 있는 형이상학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웃음거리에 가깝다.

 


3. 헤겔, 『정신현상학』 - 진리를 향한 의식의 모험

 


주인이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가운데 주인에게는 자립적 의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났다. 자립적 의식은 주인을 위해 있지 않고 오히려 비자립적인 것이 주인에게 남겨진다. 그러므로 주인은 독자존재를 진리로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진리는 오히려 비본질적 의식이고 이러한 의식의 비본질적 행위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진리는 노예의식이다. 주인의 지배가 보여주듯이 지배의 본질은 그것이 되고자 하는 것의 반대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노예의 예속은 예속이 온전히 실행되었을 때 오히려 그것의 직접적인 모습과는 반대로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안으로 떠밀려 든 의식으로서 자신 안으로 향하며 참된 자립성으로 전도된다.

 

 

 

Ⅲ. 해방된 감성, 웰빙을 이끌다.

 


1.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몸’, ‘생명’ 그리고 ‘자기’를 찾는 서양의 고전

 


사람은 극복되어져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사람은 짐승과 극복인 사이를 잇는 밧줄, 하나의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점이다.

 


2.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 언어학적 상상력의 보물

 


앞서 말한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언어 속에는 오직 차이들 밖에 없다. 더구나 그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차이는 차이가 설정되는 포지티브한 구성항들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언어 속에는 포지티브한 구성항들이 없는 차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기표를 취하건 기의를 취하건, 언어는 언어 시스템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관념도 소리도 포함하지 않으며, 이 같은 시스템으로부터 나오는 개념적 차이들과 음성적 차이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기호 속에 관념이나 음적 질료가 있다는 사실 보다는 그 기호 주변에 다른 기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

 


3. 푸코, 『감시와 처벌』 - 이성이 곧 권력이다

 


권력은 특정한 지식을 만들어 내며 권력과 지식은 서로를 직접 포함한다. 어떤 지식영역과의 상관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권력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권력적 관련을 상정하지 않거나 조립하지 않는 지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분명히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에서 상정되는 가상적 원자임에 틀림없다. 또한 개인(인간)은 내가 규율이라고 명명한, 권력의 특수 기법이 만들어 낸 존재인 것이다.

 


4. 프로이트, 『꿈의 해석』- 무의식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

 


모든 것이 상상 속의 산책을 본보기로 하여 계획되어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권위의 어두운 숲이 처음에 나타난다. 다음에는 동굴 같은 협곡이 나오는데, 나는 독자들을 인도해 그곳, 특이함고 세밀함, 무분별, 악담이 들어 있는 꿈을 지나간다. 그러자 갑자기 높은 언덕이 나타나고 시야가 트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너는 어느 길로 가기를 바라느냐?”

- 1899년 8월 6일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5.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 새로운 삶의 예술

 


프롬에 의하면 소유의 추구는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특성에 의해 인식되고, 인간에게 본래적인 실천을 능동화함으로써 부정된다. 즉 ‘소유하는 것(having)’을 부정적 실천으로 지양하는 것은 단순히 ‘소유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가치인 삶, 곧 ‘존재하는 것(being)’을 추구하는 것이다. 프롬을 다시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산업화 사회를 벗어나 자율적인 인간이 살아남는다고 하는 희망의 재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 제기야말로 프롬의 생애를 관통한 에너지라고 평가할 수 있다.

 

 

 

Ⅳ. 시간과 문명의 파노라마

 


1.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 몽골 대칸의 나라를 찾아서

 


이 책을 읽거나 듣는 사람은 누구나 믿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도건 이교도건 혹은 타타르인이건 인도인이건, 아니 어떤 종족에 속한 인간이건 간에, 이 마르코님이 찾아다녀서 알고 있는 만큼 세상의 여러 곳과 정말로 놀라운 것들에 대해 알거나 탐구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보거나 진실되게 들은 갖가지 놀라운 것들을 글로 쓰게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게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죄악이 될 것이라고.

 


2. 그람시, 『옥중수고』 - 상부구조로서의 시민 사회론

 


지식인과 생산 세계의 관계는 기초적인 사회집단이ㅡ 경우에서처럼 직접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수준에서 사회의 전체 구조 및 지식인이 바로 ‘기능인’으로 되어 있는 복합적인 상부구조에 의해 ‘매개’된다. …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주요한 상부구조 ‘수준’을 확정하는 것이다. 즉 ‘시민사회’라고 불릴 수 있는 것, 흔히 ‘사적’이라고 불리는 유기체들의 총체와, ‘정치․사회’혹은 ‘국가’로 불릴 수 있는 것이 그 두 가지이다. 이러한 두 가지 수준은 한편으로 지배 집단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행사하는 ‘헤게모니’기능과, 다른 한편으로 국가와 ‘법률상의’ 정부를 통해 행사되는 ‘직접적인 지배’나 통치 기능에 조응한다.

 


3. 브로델, 『물질문명, 경제, 자본주의』 - 역사학의 거인이 만든 문명사

 


세계사는 가장 대담한 자, 혹은 가장 순진한 자라도 용기를 잃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강변이 없는 강, 시작도 끝도 없는 강과 같다. 아니 이 비유도 적당치 않은 듯하다. 세계사란 하나의 강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강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역사가들은 이와 같은 과잉에 이미 익숙해 있다. 그들은 이 과잉을 여러 영역(정치사, 세계사, 사회사, 문화사)으로 나누어서 단순화한다. 특히 그들은 경제학자들로부터 시간이란 여러 개의 시간성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시간은 길들여지고 결국 조종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세계사를 단순화하고 조직화하는 데 아주 유용한 수단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수준에서 영위되는 삶의 시간, 즉 ‘세계의 시간’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4.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 ‘비(非)서양’으로 소외된 언설

 


동양이란 사실상 유렵인의 머리 속에서 조작된 것이었고, 옛날부터 로맨스나 이국적인 존재, 무엇엔가 사로잡힌 기억과 풍경, 진지한 체험담 등의 무대가 되어왔다. … 어떤 의미에서 동양이란 얼마 전에 생겨났다가 이젠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마도 서양인들에게는, 동양인들이 그러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싸우고 있다고 하는 것도, 또 샤또브리앙이나 네르발의 시대에도 동양에는 동양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도, 나아가 그곳에서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동양인이라는 것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Ⅴ. 문명의 가면을 벗기다

 


1. 다윈의 『종의 기원』 - 무상하고도 장엄한 세계

 


우리는 ‘자연’의 얼굴이 기쁨에 젖어 빛나는 것을 본다. 이따금 식량이 남아돌아가는 것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위에서 한가롭게 지저귀고 있는 새들이 대체로 곤충이나 씨앗을 먹고 살아가며 이리하여 끊임없이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않거나 잊고 있다. 노래하는 새나 그 알이나 새가, 동물을 잡아먹는 새나 짐승에 의해 얼마나 많이 잡아먹히고 있는지를 잊고 있다. 지금은 식량이 남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렇지 못한 시절이 오고야말 것임을 항상 유념하지는 못한다. 생존을 위한 보편적인 투쟁이 진리라는 사실을 말로 인정하는 것만큼 쉬운 일도 없지만 이 결론을 항상 명심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일은 없다.

 


2.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 이해란 무엇인가?

 


“만약에 원자의 내부구조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객관적 서술로써는 접근하기 어렵고, 또 우리가 이 구조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나 원자를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어는 잠시 머뭇거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때에 동시에 이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3. 토머스 쿤 『과학 혁명의 구조』 - 과학사를 ‘혁명’으로 재해석하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째서 혁명이라고 불리어야 하는가? 정치적 발전과 과학의 발전 사이에는 엄청난 본질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유비관계가 양쪽에서 혁명을 발견하는 은유를 정당화시키는가?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의 어떤 측면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200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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