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대구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

황순규 2013. 3. 17. 15:45
728x90
대구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
- 전설과 민담을 찾아서-
- 김기현

팔공문화원에서 발간한 향토역사 관련 책. 어렴풋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도 있지만 새롭게 접해보는 이야기들도 많네요. 팔공산을 비롯한 동구 곳곳을 돌아다닐 때 참고삼아 보면 좋을 듯 해서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렵니다.


"동구의 중요한 스토리텔링으로 첫째, 팔공산과 동화사 등의 불교문화, 둘째, 부인사와 최고의 지혜 대장경, 셋째, 불로고분과 고려왕조의 기운을 틔운 공산전투, 넷째, 아양루가 있는 금호강을 꼽고 싶습니다.
동구의 오래된 이야기는 팔공산과 금호강을 중심으로 한 동구민들의 역사와 문화이며 지역민들의 생각과 가치 속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동구지역에 있는 신화나 전설, 효행담, 민담 등을 채록한 이 이야기는 지역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며 훌륭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 발간사 중에서.

----------------
p58
표충단 외에도 이 일대와 대구 근교에는 왕건에 얽힌 지명이 많이 있으니 왕건군사가 패군했다는 파군터, 왕건이 머물고 갔다는 왕산, 왕건이 혼자 앉았다는 독좌암, 왕건이 겨우 위험을 벗어나 노한 얼굴을 풀었다는 해안, 그의 탈출로를 비춰주던 새벽달이 외로웠던 반야월, 이곳에 서야 안심했다고 안심읍, 왕건 견훤 두 군사가 강 양쪽에서 서로 대치해 싸울 때 화살이 강을 이루었다는 살내, 포위망을 벗어난 왕건이 시장하고 피곤해 숲 속에 숨었을 때 나무꾼이 주먹밥을 나눠준 뒤 나무하고 돌아와 보니 사람이 없어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왕이더라 그래서 왕일 잃은 곳이란 실왕 처음 실왕으로 부르던 이곳은 차츰 발음이 어렵다 해서 지금은 "시량"으로 불리고 있다.
왕건이 반야월에서 방향을 바꿔 대명동 안지랑 계곡으로 왔을 때 마른 목을 추겼다는 장군수, 그가 잠시 숨어 정세를 살폈다는 은적함 등 그에 얽힌 지명, 산이름 강이름은 대구 일대에 수없이 많다.
----
p94
효목동의 유래
현재 행정구역상 효목동은 수성구 만촌동과 동구 신천동과 연접되어 있는데 효목동이라 불리기 이전에는 소목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동래 정씨가 난을 피해 당시 수성현 수북면 소목골에 입향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신천동을 한골이라 한데 비해 효목동을 적은 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예전에 동래 정씨 12대조의 정려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위치조차도 모르고 있으며 유달리 선조를 봉양하고 화목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 이후 효도하고 화목하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인해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소목골을 한자식으로 '효목(효목)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효목동은 소목골의 다른 명칭이다.
이 동에는 갑오경장 이후 487번지에 당시 유일한 기와집을 마련하여 서당을 만들어 자제 훈육에 힘썼고, 그 이후 경로당, 고등공민한교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지금 효목교회 자리에는 당목이 있었고 이 당목을 기점으로 하여서 적은 골, 큰 골로 나뉘었다고 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만촌동이나 10여 년 전에는 효목동이었던 효목못 주위에는 판교지라는 숲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못은 지금 메워져 효목공원으로 쓰이고 있으나 주위의 느티나무는 아직까지 남아 효목동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아울러 지금은 신천동인 동부정류장 부근을 그 때는 야시골이라 했는데 유독 언덕이 높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지금으 만촌동으로 편입된 지역으로 군의학교 제일육군병원 뒤쪽 산은 인재가 많이 날 형상이라서 중국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산 줄기를 끊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당시 효목동으로 들어오려면 이 산을 넘었어야 했는데, 그 산 주위에 돌무덤이 있어서 쉬어 가곤 했다는데서 '쉬목골'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현재 아양교 부근을 금정나루라 했는데 이는 경주와 서울을 연결하는 요충지 구실을 했다고 한다.
...김광순, 한국구비문학, 국학자료원, 2001. 에서 발췌...
----
p104
큰고개의 유래
아양초등학교에서 현 파티마 병원쪽으로 오는 오르막길을 큰 고개라 부르는데, 큰 고개란 지명이 언제부터 불리어 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양초등학교 앞에는 작은 고개가 있었고 거기서부터 500미터쯤 오면 조금 높은 길이 있는데 이 길을 큰 고개라 불렀다.
옛날에는 이 큰 고개가 꽤나 높고 꼬불꼬불 했던 길로서 지겟군은 몇번을 쉬어 넘었고, 소달구지도 뒤에서 밀고 밀어 겨우 넘었으며 일제 중기에 나온 목탄차도 헐떡이며 넘다가 엔진이 꺼지면 다시 시동을 걸어 넘을 정도였으니 짐작할만 하다. 또 공산면 일대 주민들이 땔감을 팔러 다니던 고갯길이었다 한다. 이 고갯길은 일제시에 대구-하양-영천을 잇는 국도가 개설되면서 차차 길이 넓어지기 시작하여 1950년에서 1977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친 국도 확장 공사로 높았던 고갯길이 계속 낮아져 지금은 35m의 넓고 완만한 고개로 변하여 옛날 큰 고개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제보자: 서봉수, 79세, 남, 채록일자: 2012. 6. 1. 대구시 동구 입석동에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