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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정도를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황순규 2019. 12. 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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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대구 북구에서 일가족 4명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40대 초반' 부부와 중학생, 초등학생 '자녀'가 함께였다는데 무던히 지나칠래야 지나칠 수가 없더라. 유서는 없고 미납 고지서와 독촉장만 수북했다니 생활고야 말해 무엇하겠나.
이미 수년 전, 복지제도의 문을 두드렸었다고 한다. 차상위계층 지정 신청을 했지만 월 200여만의 수입도, 영업용 트럭도, 월세보증금도 모두 '기준 이상'이어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사업 실패로 인한 1억원 상당의 채무와 매달 월급을 쪼개 빚을 갚아나가야 했던 사정은 '제도'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연스럽게 '긴급복지' 대상도 될 수 없었다. 연말이면 어려운 이웃을 찾아달라는 현수막은 잘만 걸리던데, '어려움'은 도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한다는 말일까.

목숨을 끊는 것 외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이들 가족의 선택에 책임을 묻고자 함이 아니라. 가난을 이들 가족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1930년에 "100년 뒤에는 살림살이가 8배 더 나아져 노동시간이 주당 15시간(하루 3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지표로 보이는 살림살이는 그만큼 나아졌는데, 하루 3시간만 일해도 된다는 '풍족'과 '여유'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니, 먹고 살만하다는 고사하고 여전히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

추모의 마음으로 국화꽃 한송이 놓았지만.
이 현실을 바꿔내지 않고서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더 커질 따름이다.


-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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